얼쑤 거창

거창의 눈, 망실봉에서 본 구름바다

아림신 2011. 10. 23. 22:18

 

 

거창으로 귀농을 하면서 작심한 게 있다.

거창 둘레길(거창을 에워싸고 있는 산길)을 몇 번이고 걸어보는 것.

그러나 이런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나 일 년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거창 주변 산 중에 양각산을 올라가보고는 다시 주저앉아 있다.

오늘 아침에는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망실봉을 올랐다.

가는 길을 잘 알지 못하여 차를 끌고 산 턱밑까지 갔다.

차를 세워두고 약 스무 걸음정도 올라갔다.

활공장이 보이는가 했더니 눈앞에 선계가 열렸다.

아, 운해!

구름바다, 아니 안개바다가 거창을 덮고 있다.

 

 

거창은 분지다.

거창을 둘러싸고 있는 큰 산 사이는 구름에 묻혀 고요하다.

사람들, 빌딩들, 움직이는 모든 것들, 서 있는 것들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구름바다는 한창 파도치듯 이산저산으로 구름을 밀어낸다.  

 

 

저 의자에 잠시 앉아 구름바다를 보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구름바다 아래서 소리만 구름과 부딪히다가 흩어진다.

세상의 뿔이란 뿔 죄 덮어버린,

이긴 자의 포효도

진 자의 분함도

이고 진 짐들 죄 덮어버린 안개바다, 구름바다는 무애 그리 아웅다웅할 일 있느냐 말하는 듯하다.

의자에 온기가 생길 때쯤 일어섰다.

 

 

망실봉 활공장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백지로 돌아가셨다.

 

 

활공장에서 망실봉으로 가는 길옆에 화장실이 있는데 무척 외로워보인다.

 

 

 

 

 

10시 5분 정도였지, 아마.

저 아래 거창에 숨 구멍이 생긴다.

 

 

참았던 숨 몰아쉬는 소리가 망실봉까지 들린다.

 

 

오늘은 차를 몰고 오느라 저 길을 걷지 못했다.

거창읍이 숨 쉬는 소리 듣고 있는데 등산객 한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저 길로 올라 온다.

그리고, 

건계정 주차장에 건너편 산길을 타면 저 길과 만나며 빠른 걸음으로는 45분 정도 걸리고

대략 한 시간 정도 산을 타면 망실봉을 밟는단다.

 

 

 

철쭉 한송이 혼자 피어 있다.

왜, 지금이냐고 묻지 않았다.

 

사연이 있겠지.

이제야 핀 사연이 있겠지.

 

들으면 아플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조금만 더 눈빛 주고 있었다면 철쭉은 울먹이며 내 발길을 잡았을 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외면하는데 익숙해졌다.

외면에 익숙해진 자는 이미 병인이다.

그 순간부터 죽음의 골짜기에 발 내딛은 것이다.

 

철쭉은 누군가에게 사연 한자락 풀어놓았을까.

누구 한 사람 들어 주었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느 한 생명이라도 온기 서로 나누었을까.

 

 

 

 

 

구절초야 제철에 피었으니 제 할 일 잘하겠지.

혼자도 아니고 둘이, 그것도 다정해 보여 마음이 놓인다.

 

 

패랭이도 지금에사 꽃을 이고 있다.

모든 것,

제 때가 있는데 패랭아, 패랭아.

어찌 때를 놓쳤느냐.

 

                                                               

 

숨이 트인 거창이 하나 둘, 어제의 모습 드러내며 기지개를 켠다.

 

 

아름다운 거창으로 돌아온 일, 새삼 잘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