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무이파가 한반도 서쪽과 내륙을 휩쓰는 때에
충청남도 청양을 다녀 올 일이 생겼다.
볼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장곡사를 찼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탓인지 한 여름 피서철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 먹고라도 가봐고 싶었던 장곡사를 겸겸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감사하다.
오르막 길을 오르니, 장곡사가 우중으로 보인다.
조선의 성리학 시대에 불벼락을 맞은 불교는 살아남기에 급급헤진다.
오가는 선비부터 토호 양반네, 선비들은 노소 구분없이 중들을 노비마냥 취급하고 너나들이 부렸다.
살아남고자 산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도 절간이 자리 잡은 곳은 영락없는 풍류천국 터.
수행불자들이 볼 때 이런 난봉꾼은 다시 없는 기라.
산중 절간 무슨루 무슨 루는 사실 대문이자 이런 유파들의 침탈을 망보는 망루이자,
한탄의 세월을 견뎌내는 인내의 통로였다.
루각의 덧문이 이런 사실을 웅변한다.
모든 루는 개방이다.
왜 조선 시대 특히 임란이전기에 이러한 덧문 씌운 루가 성행할까.
개방이 아닌 덧문을 씌운 고육지책의 시기를 견딘 조선의 절간 건축을 볼 때 그대 그 중들의 곤난이 보이는 듯하다.
범종루와 화장실은 최근 배치이지 싶다.
대문 격인 루 앞으로 종루가 나오는 사찰 배치는 드물다.
짧은 식견으로 이런 배치는 보지 못했다.
눈 대중으로 경사 30도가 넘어 보이는 급경사 사찰에 이런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저 덧문을 통해 난봉 유생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동자나 소사미들의 가슴은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열반을 바라는 마음에 이런 포작의 서글픔이 겹겹이 쌓였으리라.
어찌 매사, 매시를 용서만으로 살 수 있겠는가.
일어서는 곤혹의 장막을 쳐내고 쳐내며 견뎠으리라.
고행이 따로 없었으리.
허, 고려 때 절간 중들의 횡포를 마치 남의 불보듯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 또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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